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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광장에서 바라본 전일빌딩 245. 오른쪽에 민주광장 시계탑이 보인다.
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오월길 희생 코스는 21.5㎞에 달한다. 6개 코스 중 가장 길다. 옛 도청에서 시작해 외곽의 배고픈다리 일대,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 등 남쪽 지역 사적지들을 크게 돌아 다시 시내로 들어온다. 시내 구간은 사적지들이 밀집해 있고 이런저런 볼거리들이 많아 걸을 만하지만 남쪽 외곽 사적지들은 큰 도로변을 줄곧 걸어야 해서 수월치 않다. 외곽 구간은 버스를 이용해 둘러보고 다시 시내로 들어와 마저 걷는 방식을 택했다.
오월길은 5·18민중항쟁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옛 도청 등 시내 일대에서 각 코스가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형태다. 코스에 따라 사적지가 중첩되는 곳도 있고, 。으로 멀리 떨어진 곳들이 연결된 경우도 있어 형편껏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518번 버스를 타는 것도 방법이다. 518번 버스는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부터 상무지구의 5·18자유공원까지 33.4km를 달린다. 광주광역시가 지정한 5·18 사적지 30곳 중 14곳을 연결한다. 배차 간격이 다소 긴 게 흠이지만 이 버스를 적절히 이용해 항쟁의 흔적을 살피는 것도 괜찮다.
희생 코스 출발。인 옛 도청 5·18민주광장 건너편에는 전일빌딩 245가 있다. 민주광장 시계탑에서 건널목 하나 건너면 바로 전일빌딩이다. 245란 명칭이 붙은 건 이곳에서 항쟁 당시 계엄군 헬기가 쏜 총탄 흔적 245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1968년 지어진 이 건물은 지역 언론사들이 입주해 있다가 1990년대 이후 쇠퇴하면서 2011년 광주광역시가 매입했다. 애초 건물을 철거하고 인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주차타워를 지으려 했지만 오월항쟁의 역사적 현장이란 지적이 제기돼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그런데 2016년 리모델링 과정에서 뜻밖에 탄흔들이 무더기로 발견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 감식을 통해 계엄군 헬기 사격의 결정적 증거로 파악됐다.
10층 높이의 전일빌딩 245는 건물 전체가 활기찬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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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관련 전시 공간이 9·10층에 마련돼 있고 나머지 층에도 갤러리, 카페, 정보도서관, 콘텐츠기업 허브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옥상인 전일마루에서 내려다 보는 옛 도청과 5·18민주광장, 금남로의 모습도 시원하다. 멀리 무등산이 넉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탄흔들이 발견된 장소는 빌딩 10층이다. 탄흔을 잘 살필 수 있도록 유리워크가 조성돼 있다. 투명한 유리판 위를 걸으면 바닥 여기저기에 나 있는 탄흔들이 보인다. 유리워크를 통해 창문 쪽으로 가보니 콘크리트 기둥 상단이나 천장 마감재에도 어지럽게 총탄 흔적들이 널려 있다. 탄흔들에는 각각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여러 개의 탄흔이 촘촘히 박혀 있어 총탄 수십발이 한꺼번에 쏟아진 걸 알 수 있다. 전쟁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헬기의 무자비한 총탄 세례가 도심 한복판 대형 빌딩에서 버젓이 벌어진 것이다.
전일빌딩 245 옥상에서 바라본 5·18민주광장. 정면에 옛 도청과 분수대가 보이고, 왼쪽 파란색 지붕이 상무관이다.
10층의 별도 공간에서는 ‘헬기 사격 디오라마(Diorama) 전시’를 하고 있다. 마치 작은 극장처럼 꾸며진 공간에 모형 헬기가 공중에 매달려 있고, 영상과 조명을 활용해 당시의 긴박했던 헬기 사격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헬기가 레일을 따라 움직이며 굉음과 함께 기총소사 소리가 이어지니 당시 현장의 긴박감이 느껴진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모형 헬기를 이렇게 요란하게 구동하는 게 헬기 기총소사의 진실 규명과 무슨 관계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전일빌딩에서 245개 탄흔이 발견되면서 헬기 사격 논란은 새 국면을 맞았다. 최초 문제제기는 1989년 광주M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고 조비오 신부가 증언한 목격담이었다. 조 신부는 1980년 5월21일 오후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불빛을 봤다고 증언했다. 당시는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했던 즈음이었다. 미국인으로 광주 양림동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개신교 목사 아널드 피터슨도 헬기의 기총소사를 목격했다. 21일 오후 양림동 집 옥상 발코니에서 광주 상공을 날아다니는 헬기의 밑면에서 불빛이 번쩍이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이들 외에도 여러 사람이 21일 오후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계엄군의 헬기 기총소사가 초。이 되는 것은 만약 사실이라면 신군부의 ‘자위권’ 주장이 정당성을 잃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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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군부는 5·18 진압이 광주 시민들의 무장 폭동에 맞선 불가피한 ‘자위권 발동’이었다고 강변했다. 심지어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쏴서 응사했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1995년 검찰 수사,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는 계엄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걸 적시하고 있다. 만약 군이 헬기까지 동원해 공중에서 무차별 기총소사를 했다면 이는 방어 차원을 넘어선 치밀하고 계획적인 무력 진압이자 무고한 시민을 향한 국가 폭력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광주광역시 의뢰를 받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7년 1월 감정보고서에서 당시 전일빌딩 이외의 높은 건물이 없던 .으로 미루어 헬기 사격에 의한 탄흔일 가능성이 높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헬기가 호버링(공중정지) 상태에서 고도만 상하로 변화하면서 사격한 정황이 유력하다는 것이다. 국과수가 빌딩 10층 탄흔들의 진행 방향과 각도를 추적해 보니 대략 40~50도 안팎의 각도로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당시 전일빌딩 주변엔 이런 각도로 탄환을 발사할 정도의 높은 건물은 없었다.
전일빌딩 245 건물 10층의 콘크리트벽 기둥에서 발견된 헬기 기총소사 탄흔들. 탄흔들 각각에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그런데 전두환이 2017년 4월 회고록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부정하고 조비오 신부와 피터슨 목사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조 신부 유족은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2020년 1심 법원은 전두환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법원은 5월21일과 5월27일 무장헬기에 의한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후 2021년 전두환이 사망하면서 항소심은 중단됐지만 민사소송에 따른 배상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5·18조사위는 2024년 보고서에서 5월21일 광주천 불로동다리 상공에서 506항공대 소속 500MD 헬기가 광주천과 광주공원, 사직공원을 향해 위협사격 수준 이상의 사격을 했다고 적었다. 5월21일 낮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헬기 사격이 실행된 것이다. 또 5월22일 AH-1J 코브라 헬기 2대가 기당 500발씩 무장하고 출동했고, 이 헬기가 1980년 당시 조선대 절토지였던 지역에서 발견된 20㎜ 탄두를 사격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인정했다. 5월27일 도청 진압 작전 당시 전일빌딩 옥상에 대공화기가 설치됐다는 첩보에 따라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조사위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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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조사위는 헬기 사격의 입증 증거로 5월20일 또는 21일 헬기 무장사들에게 20㎜ B/L탄과 보통탄, 7.62㎜ 탄약을 지급했고 그중 3분의 1이 소비된 상태로 회수됐다는 당시 제31항공단 최아무개 탄약관리하사의 증언, 203항공대의 조종사가 광주비행장에서 시위대에 대한 사격 지시가 있었는데 조종사가 거부하고 광주천에 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를 조종사들끼리 주고 받았다고 진술한 ., 5월27일 새벽 도청 진압 작전 이후 전일빌딩에서 아나운서 최아무개와 광고부 직원 심아무개가 10층에 올라가 총탄 흔적과 총탄 구멍이 나 있는 유리창을 목격했고 일그러진 납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 증언 등을 제시했다.
헬기 기총소사 문제는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났지만 항쟁 당시 발포 명령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5월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무려 41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됐다. 5·18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21일 도청 앞에서 “중령 대대장”의 명령에 의해 장갑차에 탑승한 계엄군이 캘리버 50 기관총을 하늘을 향해 최초로 발포했고, 이후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집단 발포가 사격 통제 없이 30여분 지속됐다. 캘리버 50 최초 발포자로 추정되는 515호 장갑차의 최아무개(기갑학교 9전차대대 장갑차 소대장)는 “(자신의 장갑차 뒤에 서 있던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은 키가 작았던 대대장이)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라’고 명령해 3~4번 정도 하늘로 。사했다. 이후 시위대 장갑차 바퀴를 향해 캘리버 50을 발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최씨는 발포 지시를 한 대대장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보고서는 5월21일 아침 8시께 광주와 전·남북 일대에 진돗개 ‘하나’가 발동되고 비슷한 시각 도청 앞 병사들에게 실탄이 분배된 만큼 현장 지휘관과 병사들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도청 앞 집단 발포와 관련해 발포 명령의 실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했다며 향후 추가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전일빌딩 245 10층의 ‘헬기 사격 디오라마(Diorama) 전시’ 공간. 마치 작은 극장처럼 꾸며진 공간에 모형 헬기가 레일을 따라 움직이며 당시의 긴박했던 헬기 사격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발포 명령을 둘러싼 진실이 제대로 파헤쳐지지 못하면서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학살에 책임 있는 이들에 대한 단죄 역시 불충분하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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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18특별법 제정 이후 검찰과 법원은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 행위를 한데 묶어 연속적인 헌정 질서 파괴 행위, 즉 내란으로 규정하고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 14명을 반란 및 내란죄로 처벌했다. 법원은 당시 전두환을 비롯해 황영시 정호용 주영복 이희성 등 5명에게만 광주 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적용했고, 살인 행위를 직접 자행한 광주 현장의 지휘관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군대 특성상 절대적 구속력을 가진 명령에 따라 이뤄진 살상 행위라서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결국 학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장 지휘관들이 전혀 처벌되지 않았고 재판 과정에서 행해진 수많은 위증 혐의와 책임 회피에 대해서도 제대로 추궁하지 못했다.
5·18조사위 보고서는 당시 검찰이 살해죄, 상해죄 등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행위를 수사했음에도 이를 적용하지 않아 심층적, 포괄적 수사를 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이로 인해 법원 역시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은 유엔인권위 제48차 보고서에는 중대한 인권 침해 범죄의 경우 “그 행위가 정부나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이 하급자의 형사 책임을 면제시키거나 법률적 경감 사유를 구성하지 않으며 다만 양형에 참작 사유가 될 뿐이다”라고 돼있다면서, 독일 연방법원은 1994년 베를린장벽에서의 탈출자를 사살한 동독 군인을 간접정범으로 처벌했다고 적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광주교도소 주변 사격 등 명백한 범죄적 학살 행위가 있었음에도 실제 방아쇠를 당기거나 직접 명령을 내린 실무자들에 대한 개별적 형사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은 5월23일 광주 외곽을 통제하던 제11공수여단 부대가 화순으로 가던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타고 있던 민간인 다수가 사망하고, 이후 버스 안에 생존해 있던 남성 부상자 2명을 군인들이 마을 뒤 야산으로 끌고 가 총살한 사건이다. 군은 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두 사람의 시신을 암매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학살에 직접 참여한 이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독일은 통일 이후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 주민을 사살한 국경경비대 병사들과 현장 지휘관들의 범죄행위를 일일이 조사해 처벌했다. 독일이 분단된 1946년부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동서독 국경에서 발생한 동독 병사들에 의한 반인륜적 살인 행위는 모두 400건에 달했다. 베를린장벽에서 140건, 다른 국경 지역에서 260건이 발생했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동독 시절의 국경통제 법규나 사살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제인권법과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명백히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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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법원은 이들 중 상당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직접 총을 쏜 병사들에 대해서는 상부의 명령에 따른 하급 집행자였다는 .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감경했고 사살 명령을 내린 최고위 인사들에게는 중형을 선고했다.
독일의 예는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단죄와 대비된다. 독일은 학살에 책임 있는 이들에 대해 장교와 병사들부터 최고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책임을 물었다. 5·18의 경우 신군부 최고위 인사 14명에 대해서만 법적 단죄가 이뤄졌다. 나머지 장성이나 현장 지휘관 중 개별적 형사 책임을 지워 재판에 넘겨진 사례는 없다. 광주에서의 학살을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공소시효까지 정지했지만 조사와 단죄는 아주 제한적이고 상징적으로 이뤄졌다. 더욱이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감옥에 들어간 지 불과 2년 만에 모두 특별사면됨으로써 추가적인 단죄 가능성은 사실상 막혔다.
46년 전 광주에서의 학살에 책임 있는 이들을 어디까지, 어떻게 처벌했어야 하는지를 이제 와서 얘기한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상징적 처벌과 너무 이른 정치적 사면으로 포괄적·실체적 단죄의 길은 사실상 막혔다. 뒤늦게 진상규명을 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지난 탓에 쉽지 않았다. 5·18조사위가 2024년까지 4년여 진상규명 작업을 벌였지만 발포 명령 책임자 등 오랜 쟁.을 규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런 역사적·정치적 한계가 최근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논란과 배재고 야구부 ‘5·18 조롱 응원’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안종철, ‘5·18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아시아문화커뮤니티, 2016)
김정인 김정한 은우근 정문영 한순미, ‘너와 나의 5·18’(오월의봄, 2019)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
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홈페이지 https://www.518archives.go.kr/dcma/main/Home.do
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기 사격 논란은 새
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오월길 희생 코스는 21.5㎞에 달한다. 6개 코스 중 가장 길다. 옛 도청에서 시작해 외곽의 배고픈다리 일대, 주남마을 인근 양민 학살지 등 남쪽 지역 사적지들을 크게 돌아 다시 시내로 들어온다. 시내 구간은 사적지들이 밀집해 있고 이런저런 볼거리들이 많아 걸을 만하지만 남쪽 외곽 사적지들은 큰 도로변을 줄곧 걸어야 해서 수월치 않다. 외곽 구간은 버스를 이용해 둘러보고 다시 시내로 들어와 마저 걷는 방식을 택했다.
오월길은 5·18민중항쟁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옛 도청 등 시내 일대에서 각 코스가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형태다. 코스에 따라 사적지가 중첩되는 곳도 있고, 。으로 멀리 떨어진 곳들이 연결된 경우도 있어 형편껏 도보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518번 버스를 타는 것도 방법이다. 518번 버스는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부터 상무지구의 5·18자유공원까지 33.4km를 달린다. 광주광역시가 지정한 5·18 사적지 30곳 중 14곳을 연결한다. 배차 간격이 다소 긴 게 흠이지만 이 버스를 적절히 이용해 항쟁의 흔적을 살피는 것도 괜찮다.
희생 코스 출발。인 옛 도청 5·18민주광장 건너편에는 전일빌딩 245가 있다. 민주광장 시계탑에서 건널목 하나 건너면 바로 전일빌딩이다. 245란 명칭이 붙은 건 이곳에서 항쟁 당시 계엄군 헬기가 쏜 총탄 흔적 245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1968년 지어진 이 건물은 지역 언론사들이 입주해 있다가 1990년대 이후 쇠퇴하면서 2011년 광주광역시가 매입했다. 애초 건물을 철거하고 인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주차타워를 지으려 했지만 오월항쟁의 역사적 현장이란 지적이 제기돼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그런데 2016년 리모델링 과정에서 뜻밖에 탄흔들이 무더기로 발견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 감식을 통해 계엄군 헬기 사격의 결정적 증거로 파악됐다.
10층 높이의 전일빌딩 245는 건물 전체가 활기찬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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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관련 전시 공간이 9·10층에 마련돼 있고 나머지 층에도 갤러리, 카페, 정보도서관, 콘텐츠기업 허브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옥상인 전일마루에서 내려다 보는 옛 도청과 5·18민주광장, 금남로의 모습도 시원하다. 멀리 무등산이 넉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탄흔들이 발견된 장소는 빌딩 10층이다. 탄흔을 잘 살필 수 있도록 유리워크가 조성돼 있다. 투명한 유리판 위를 걸으면 바닥 여기저기에 나 있는 탄흔들이 보인다. 유리워크를 통해 창문 쪽으로 가보니 콘크리트 기둥 상단이나 천장 마감재에도 어지럽게 총탄 흔적들이 널려 있다. 탄흔들에는 각각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여러 개의 탄흔이 촘촘히 박혀 있어 총탄 수십발이 한꺼번에 쏟아진 걸 알 수 있다. 전쟁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헬기의 무자비한 총탄 세례가 도심 한복판 대형 빌딩에서 버젓이 벌어진 것이다.
전일빌딩 245 옥상에서 바라본 5·18민주광장. 정면에 옛 도청과 분수대가 보이고, 왼쪽 파란색 지붕이 상무관이다.
10층의 별도 공간에서는 ‘헬기 사격 디오라마(Diorama) 전시’를 하고 있다. 마치 작은 극장처럼 꾸며진 공간에 모형 헬기가 공중에 매달려 있고, 영상과 조명을 활용해 당시의 긴박했던 헬기 사격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헬기가 레일을 따라 움직이며 굉음과 함께 기총소사 소리가 이어지니 당시 현장의 긴박감이 느껴진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모형 헬기를 이렇게 요란하게 구동하는 게 헬기 기총소사의 진실 규명과 무슨 관계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전일빌딩에서 245개 탄흔이 발견되면서 헬기 사격 논란은 새 국면을 맞았다. 최초 문제제기는 1989년 광주M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고 조비오 신부가 증언한 목격담이었다. 조 신부는 1980년 5월21일 오후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불빛을 봤다고 증언했다. 당시는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했던 즈음이었다. 미국인으로 광주 양림동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개신교 목사 아널드 피터슨도 헬기의 기총소사를 목격했다. 21일 오후 양림동 집 옥상 발코니에서 광주 상공을 날아다니는 헬기의 밑면에서 불빛이 번쩍이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이들 외에도 여러 사람이 21일 오후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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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군부는 5·18 진압이 광주 시민들의 무장 폭동에 맞선 불가피한 ‘자위권 발동’이었다고 강변했다. 심지어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쏴서 응사했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1995년 검찰 수사,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는 계엄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걸 적시하고 있다. 만약 군이 헬기까지 동원해 공중에서 무차별 기총소사를 했다면 이는 방어 차원을 넘어선 치밀하고 계획적인 무력 진압이자 무고한 시민을 향한 국가 폭력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광주광역시 의뢰를 받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7년 1월 감정보고서에서 당시 전일빌딩 이외의 높은 건물이 없던 .으로 미루어 헬기 사격에 의한 탄흔일 가능성이 높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헬기가 호버링(공중정지) 상태에서 고도만 상하로 변화하면서 사격한 정황이 유력하다는 것이다. 국과수가 빌딩 10층 탄흔들의 진행 방향과 각도를 추적해 보니 대략 40~50도 안팎의 각도로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당시 전일빌딩 주변엔 이런 각도로 탄환을 발사할 정도의 높은 건물은 없었다.
전일빌딩 245 건물 10층의 콘크리트벽 기둥에서 발견된 헬기 기총소사 탄흔들. 탄흔들 각각에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그런데 전두환이 2017년 4월 회고록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부정하고 조비오 신부와 피터슨 목사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조 신부 유족은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2020년 1심 법원은 전두환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법원은 5월21일과 5월27일 무장헬기에 의한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후 2021년 전두환이 사망하면서 항소심은 중단됐지만 민사소송에 따른 배상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5·18조사위는 2024년 보고서에서 5월21일 광주천 불로동다리 상공에서 506항공대 소속 500MD 헬기가 광주천과 광주공원, 사직공원을 향해 위협사격 수준 이상의 사격을 했다고 적었다. 5월21일 낮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헬기 사격이 실행된 것이다. 또 5월22일 AH-1J 코브라 헬기 2대가 기당 500발씩 무장하고 출동했고, 이 헬기가 1980년 당시 조선대 절토지였던 지역에서 발견된 20㎜ 탄두를 사격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인정했다. 5월27일 도청 진압 작전 당시 전일빌딩 옥상에 대공화기가 설치됐다는 첩보에 따라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조사위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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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조사위는 헬기 사격의 입증 증거로 5월20일 또는 21일 헬기 무장사들에게 20㎜ B/L탄과 보통탄, 7.62㎜ 탄약을 지급했고 그중 3분의 1이 소비된 상태로 회수됐다는 당시 제31항공단 최아무개 탄약관리하사의 증언, 203항공대의 조종사가 광주비행장에서 시위대에 대한 사격 지시가 있었는데 조종사가 거부하고 광주천에 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를 조종사들끼리 주고 받았다고 진술한 ., 5월27일 새벽 도청 진압 작전 이후 전일빌딩에서 아나운서 최아무개와 광고부 직원 심아무개가 10층에 올라가 총탄 흔적과 총탄 구멍이 나 있는 유리창을 목격했고 일그러진 납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 증언 등을 제시했다.
헬기 기총소사 문제는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났지만 항쟁 당시 발포 명령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5월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무려 41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됐다. 5·18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21일 도청 앞에서 “중령 대대장”의 명령에 의해 장갑차에 탑승한 계엄군이 캘리버 50 기관총을 하늘을 향해 최초로 발포했고, 이후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집단 발포가 사격 통제 없이 30여분 지속됐다. 캘리버 50 최초 발포자로 추정되는 515호 장갑차의 최아무개(기갑학교 9전차대대 장갑차 소대장)는 “(자신의 장갑차 뒤에 서 있던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은 키가 작았던 대대장이)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라’고 명령해 3~4번 정도 하늘로 。사했다. 이후 시위대 장갑차 바퀴를 향해 캘리버 50을 발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최씨는 발포 지시를 한 대대장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보고서는 5월21일 아침 8시께 광주와 전·남북 일대에 진돗개 ‘하나’가 발동되고 비슷한 시각 도청 앞 병사들에게 실탄이 분배된 만큼 현장 지휘관과 병사들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도청 앞 집단 발포와 관련해 발포 명령의 실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했다며 향후 추가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전일빌딩 245 10층의 ‘헬기 사격 디오라마(Diorama) 전시’ 공간. 마치 작은 극장처럼 꾸며진 공간에 모형 헬기가 레일을 따라 움직이며 당시의 긴박했던 헬기 사격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발포 명령을 둘러싼 진실이 제대로 파헤쳐지지 못하면서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학살에 책임 있는 이들에 대한 단죄 역시 불충분하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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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18특별법 제정 이후 검찰과 법원은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 행위를 한데 묶어 연속적인 헌정 질서 파괴 행위, 즉 내란으로 규정하고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 14명을 반란 및 내란죄로 처벌했다. 법원은 당시 전두환을 비롯해 황영시 정호용 주영복 이희성 등 5명에게만 광주 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적용했고, 살인 행위를 직접 자행한 광주 현장의 지휘관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군대 특성상 절대적 구속력을 가진 명령에 따라 이뤄진 살상 행위라서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결국 학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장 지휘관들이 전혀 처벌되지 않았고 재판 과정에서 행해진 수많은 위증 혐의와 책임 회피에 대해서도 제대로 추궁하지 못했다.
5·18조사위 보고서는 당시 검찰이 살해죄, 상해죄 등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행위를 수사했음에도 이를 적용하지 않아 심층적, 포괄적 수사를 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이로 인해 법원 역시 개인적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개정판은 유엔인권위 제48차 보고서에는 중대한 인권 침해 범죄의 경우 “그 행위가 정부나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이 하급자의 형사 책임을 면제시키거나 법률적 경감 사유를 구성하지 않으며 다만 양형에 참작 사유가 될 뿐이다”라고 돼있다면서, 독일 연방법원은 1994년 베를린장벽에서의 탈출자를 사살한 동독 군인을 간접정범으로 처벌했다고 적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광주교도소 주변 사격 등 명백한 범죄적 학살 행위가 있었음에도 실제 방아쇠를 당기거나 직접 명령을 내린 실무자들에 대한 개별적 형사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은 5월23일 광주 외곽을 통제하던 제11공수여단 부대가 화순으로 가던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타고 있던 민간인 다수가 사망하고, 이후 버스 안에 생존해 있던 남성 부상자 2명을 군인들이 마을 뒤 야산으로 끌고 가 총살한 사건이다. 군은 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두 사람의 시신을 암매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학살에 직접 참여한 이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독일은 통일 이후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 주민을 사살한 국경경비대 병사들과 현장 지휘관들의 범죄행위를 일일이 조사해 처벌했다. 독일이 분단된 1946년부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동서독 국경에서 발생한 동독 병사들에 의한 반인륜적 살인 행위는 모두 400건에 달했다. 베를린장벽에서 140건, 다른 국경 지역에서 260건이 발생했다. 독일 연방대법원은 동독 시절의 국경통제 법규나 사살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제인권법과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명백히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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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법원은 이들 중 상당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직접 총을 쏜 병사들에 대해서는 상부의 명령에 따른 하급 집행자였다는 .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감경했고 사살 명령을 내린 최고위 인사들에게는 중형을 선고했다.
독일의 예는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단죄와 대비된다. 독일은 학살에 책임 있는 이들에 대해 장교와 병사들부터 최고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책임을 물었다. 5·18의 경우 신군부 최고위 인사 14명에 대해서만 법적 단죄가 이뤄졌다. 나머지 장성이나 현장 지휘관 중 개별적 형사 책임을 지워 재판에 넘겨진 사례는 없다. 광주에서의 학살을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공소시효까지 정지했지만 조사와 단죄는 아주 제한적이고 상징적으로 이뤄졌다. 더욱이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감옥에 들어간 지 불과 2년 만에 모두 특별사면됨으로써 추가적인 단죄 가능성은 사실상 막혔다.
46년 전 광주에서의 학살에 책임 있는 이들을 어디까지, 어떻게 처벌했어야 하는지를 이제 와서 얘기한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상징적 처벌과 너무 이른 정치적 사면으로 포괄적·실체적 단죄의 길은 사실상 막혔다. 뒤늦게 진상규명을 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지난 탓에 쉽지 않았다. 5·18조사위가 2024년까지 4년여 진상규명 작업을 벌였지만 발포 명령 책임자 등 오랜 쟁.을 규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런 역사적·정치적 한계가 최근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논란과 배재고 야구부 ‘5·18 조롱 응원’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안종철, ‘5·18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아시아문화커뮤니티, 2016)
김정인 김정한 은우근 정문영 한순미, ‘너와 나의 5·18’(오월의봄, 2019)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
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홈페이지 https://www.518archives.go.kr/dcma/main/Home.do
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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