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순간, ‘호남 반도체’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가 됐다. 세상은 덕을 더 본 쪽이 인사한다는 걸 안다. 기업은 ‘전력과 용수, 정주 여건 등이 갖춰지면’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정권은 기정사실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작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따로 있다. 온 나라가 반도체 하나에 이렇게 매달려도 되나.
우리 경제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여러 돛대를 단 배였다. 반도체가 흔들리면 자동차가, 자동차가 주춤하면 조선이, 그 옆엔 철강·디스플레이·이차전지·석유화학이 있어 번갈아 파도를 넘었다. 어느 하나가 꺾여도 배는 나아갔고, 여러 돛대가 펼쳐지면 금상첨화였다. 지금 그 배는 돛대 하나에 운명을 건 위태로운 범선이 되고 있다.
최근 몇 달간 온 나라가 반도체 하나에 얼마나 요동쳤는지 돌아보자. 반도체 팔아 역대급 이익을 거두자 1인당 수억 원의 성과급 잔치가 벌어졌고, 국민 배당금까지 나왔다. 개인 투자자의 절반이 반도체에 쏠려 ‘코스피는 카지노’란 소리까지 듣더니 반도체 정.론과 중국 반격설엔 순식간에 코스피가 폭락했다. 세계에서 중국 반도체 쇼크에 가장 취약한 나라도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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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외 다른 분야에서 우리가 또 겪게될 운명의 예고편 같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 수출에서 반도체 비율은 12%대, 그게 2024년 21%, 올해 6월엔 44%까지 치솟았다. ‘삼전닉스’ 두 종목 시총이 코스피 55%에 이를 정도다. 수출도, 증시도, 국민 노후 자금도 한 돛대에 매달렸다. 그 돛대가 부러지면 어찌 할 건가.
정권은 기업의 계약이나 투자 발표에 숟가락 얹고 김칫국을 마실 때가 아니다. AI 3강의 청사진은 반도체만으로 안 된다. 미·중을 좇아 범용언어모델(LLM) 경쟁에 뛰어드는 데도 있지 않다. 지금 세상이 열광하는 생성형 AI는 투자비 대비 큰돈을 못 번다. 이 지능이 공장과 로봇을 움직이는 ‘제조 AI’에 이르러야 진짜 수익성이 생긴다. 정작 미국은 이를 가능하게 할 제조업이 붕괴돼 있다. 우리는 세계 최강 제조 현장을 쥐고 있다. 엄청난 행운이자 자산이다. 자동차·철강·조선·배터리·방산까지 세계 핵심 제조업 대부분에서 우리 숙련공의 손놀림 하나하나가 곧 ‘모션 토큰’이 될 것이다. 우리 전략은 전 세계 로봇이 한국 노동자의 몸짓을 배울 때마다 로열티를 받아내는 ‘제조 AI 허브국’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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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테슬라 등 글로벌 빅테크는 로봇에 ‘일하는 법’을 가르칠 이런 작업 데이터 확보 경쟁에 한창이다.
정작 우리는 이 시。에 그 밑천이 흔들리고 있다. 많은 부분이 외부 요인보다는 내부 요인, 그것도 자해에 가까운 행동들 때문이다. 그새 중국은 조선·철강·디스플레이·이차전지를 차례로 밀어 올리며 우리의 돛대를 하나씩 꺾고 있다. 탈원전으로 값싼 전력이란 기반을 흔들었고, 과잉 환경 규제, 예외없는 주 52시간제, 송배전 건설 지연 등의 일을 스스로 벌였다. 당장 AI의 심장을 돌릴 전력과 용수 부족이 눈앞에 닥쳤다.
역설적이게도 ‘호남 반도체’가 기회다. 탈원전을 주장하던 정부가 영광 한빛·울주 새울 부지의 원전 증설을 저울질하고, 천덕꾸러기 취급하던 댐까지 다시 끌어안아 반도체 용수로 돌리는 것은 반가운 신호다. 걷어내야 할 ‘정치적 금기’가 어디 전력과 물뿐이겠는가. 온실가스 감축도 노동 존중도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다. 다만 우리만 맨 앞에서, 최고 수위로 밀어붙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제조 AI 패권이 갈리는 5~10년 골든타임에, 스스로 발목을 묶는 자해 행위만은 피해야 한다. 정치가 산업 경쟁력을 훼손하는 도그마에서만 벗어나도 우리는 AI 시대의 또 다른 돛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부지의 원전 증설